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이비드 듀크 (문단 편집) == 생애 == [[LSU]]를 졸업했다. 루이지애나 주립대에서는 백인 학생단체에서 활동하며 정치를 시작했다. [[쿠 클럭스 클랜|KKK]]에서 활동하여 1974년부터 1980년까지 KKK의 대마법사[* KKK의 우두머리]를 지냈다.[* 나름 개혁을 이뤘는데 반[[가톨릭]] 성향을 KKK에서 지운 것. 물론 [[인종차별]] 옹호는 그대로였다.]1975년에는 [[민주당(미국)|민주당]] 소속으로 [[루이지애나]] 주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물론 나이도 젊은데다가 인지도도 떨어지니 낙선. 그래도 한 당에서 여러 후보가 출마할 수 있는 루이지애나의 독특한 선거제도 덕분에 제법 표는 얻었다. 그 후 [[백인]] 권익을 위한 단체에서 일하다가 1988년 대통령 선거의 느닷없이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민주당 유력 대선후보로 떠오른 [[흑인]] 민권운동가인 [[제시 잭슨]] 목사와 대결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30대의 젊은 나이에 조직도 자금도 없었기 때문에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첫번재 예비경선인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선택되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만 부통령 후보는 보통 대통령 후보의 지명으로 뽑히는지라, 실질적인 의미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민주당 대선 후보는 당연히 선출되지 못했지만, 급조된 군소정당인 인민당의 지지를 받는 후보로 선택되어 후보자 명부에 몇몇 주에 이름이 올라 전국적으로 47,047표를 얻었다. 1988년 대선 후, [[공화당(미국)|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리고 1989년 루이지애나주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여기서는 당선되었다. 루이지애나주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90년에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선되지 못했다. 이 때 듀크가 상원의원 선거 '''공화당 경선을 뚫었다'''는 것 자체가 공화당 지도부한테 충격을 보여줬고, 공화당 지도부가 민주당 후보를 지원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44%나 표를 받았다. 당시 민주당 후보는 [[지미 카터]] 정부 시절 민주당 실세에다, 현역으로 당시 벌써 3선 상원의원이던 J. 베넷 존스턴이라는 사람이었고, 데이비드 듀크는 공화당 후보로 [[경선]]을 뚫고 나온, 그래도 확실히 정치 신인에 가까웠다. 당시 듀크의 나이는 40세. 그런데 정작 선거에서는 존스턴 54.0%(753,198표), 듀크 43.5%(607,091표)로 격차가 상당히 근소한 편에 속했다. 이 결과에 공화당이 더 놀랐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91년에는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다. 여기서도 한 당에서 여러 후보가 출마할 수 있는 루이지애나의 선거제도 덕분에 공화당에서는 당시 현직 주지사이자 민주당 출신인 버디 로머와 그가 모두 나갔다. 그리고 여기서 데이비드 듀크는 2위를 차지하여 버디 로머를 3위로 몰아내고 [[결선투표]]에 진출하게 되면서[* 루이지애나에서는 미국의 다른 주들과는 달리 정글 프라이머리(Jungle Primary)라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1차 투표에서 다수표를 얻은 후보가 나오지 않으면, 1차 투표에서 1위, 2위를 한 후보끼리 다시 겨루는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물론 연방 전체적으로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는 예외], 미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인종분리주의, 미국우월주의, 지방분권주의를 내세우며 백인 보수층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그의 주장이 너무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공화당 소속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조차 그를 지지하지 못하고 '''민주당''' 후보 [[에드윈 에드워즈]][* 이미 두 차례,3선(1972~1980, 1984~1988) 주지사를 지낸 인물로, 하도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았음에도 인기는 좋았다. 에드워즈는 1972~1980년 주지사 때는 민주당으로 했고, 87년 주지사 선거에서는 결선투표 이전 사퇴해 91년 주지사 선거에서는 전직 주지사 신분이었다. 거기다가 듀크가 2등까지 올라오자 경악한 사람들이 에드워즈에게 기부금을 퍼부었다. 오죽하면 '''마법사를 뽑느니 도마뱀을 뽑아라(Vote for the Lizard, not the Wizard)''', '''사기꾼을 뽑아라(Vote for Crook)'''같은 범퍼 스티커가 나돌 정도였다.][* 에드윈 에드워즈가 1987년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했을때 한 신문기자는 '''아돌프 히틀러가 상대가 아닌 이상 다시는 에드워즈가 당선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듀크의 등장으로 그것이 실현되었다.]를 지지하는 웃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결선투표에서는 39%를 득표하며 낙선[* 당시 에드워즈에게 어느 기자가 듀크를 이길 비책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에드워즈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살아있으면 됩니다."''']했다. 비록 주지사로 당선되지 못했지만, 당시 41세에 불과했던 그는 미국 기성 정치계에 새로운 경종을 울리는 여운을 남겼다. 데이비드 듀크는 [[1991년]] 루이지애나주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루이지애나주 하원의원 임기가 끝나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했다. 주 하원의원 선거에 재출마했으면 당선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주 하원의원 선거는 출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당 선거구에서 듀크의 후임으로 당선된 주 하원의원은 데이비드 비터라는 인물인데 이후 루이지애나주 연방 상원의원에 올라 [[2017년]] 초까지 재임했다. 비터는 이후 2015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가 [[존 벨 에드워즈]]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1992년 대선에는 공화당에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재출마가 가능한데도, 대권에 또 도전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루이지애나 경선에서 9%의 지지를 받았다. 물론 조지 부시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후 주지사, 상원의원, 하원의원 선거에 몇 번 출마했으나, 모두 1차 투표에서 20% 이하의 득표율로 광탈했다. 그래도 그를 지지하는 일정한 층은 존재한다는 점 정도만 확인했을 뿐이다. 데이비드 듀크는 [[1996년]] 루이지애나주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11%의 득표에 그쳤고, 20년이 더 지난 [[2016년]]에도 루이지애나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 이때 듀크는 이미 나이가 60대 후반에 달해 선거운동은 제한적이었다.]했으나 3% 득표에 그쳤다. 2000년대 이후로는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인종분리주의]]를 주장하는 [[극우]] 활동을 계속하면서, 본인이 직접 선거에 출마하지는 않고 외국의 극우주의 지도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2006년에는 [[이란]]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학자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교환한다는 국제회의에 참석했는데, 여기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언급을 했다고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는 [[털시 개버드]]를 반-이스라엘 후보라며 지지했으나 개버드 측은 그 '''지지를 거절'''했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지지를 받아봤자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